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경북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에 위치한 감문산(甘文山) 계림사는 신라시대 아도 화상의 창건으로 전해진다. 그러나 창건 당시의 사적은 알 수 없고, 다만 사중에 전래되는감주계림사개건기(甘州鷄林寺改建記)(1804년), 또는계림사사적기(鷄林寺寺蹟記)(1954년 현판필사) 등이 중요 사적으로 있을 뿐이다.
이들 기록에 따르면 민간에 전해지는 말에 계림사 일대의 지형은 호형(虎形) 이므로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계림사를 건립하였다고 하였다.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은 절의 건립 또는 괘불의 조성에도 향인(鄕人) 또는 향청(鄕廳) 의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. 물론 이 괘불은 같은 지역의 쌍룡사로부터 옮겨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,
일단 그 보관 장소가 계림사라는 것이 주목된다.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것은 향인들이 스스로 절의 산내에서는 묘를 개설치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. 즉 묘를 쓰면 동리의 우물 물이 변하므로 동리 사람들이 서로 감시하여 밀장(密葬) 을 금하고 있다는 점이다.
근세 계림사의 중건은 순조 4년(1804) 여러 계인(契人) 이 중심이 되어 대웅전을 비롯하여 요사, 즉 방랑(房廊) 과 공루(空樓) 를 확장하고 향연각(香烟閣) 등을 건립하였다. 이 불사는 순전히 계원(契員) 약 100여 명의 힘으로 이룩되었다.
그런데 당시만 하여도 아직 주지를 영입하지 않았음인지 계림사재건기(鷄林寺改建記) 현판기문(懸板記文)에는 주지 모(某) 라고만 하였다. 그리고 간사(幹事) 에 우치홍(禹治洪) 외 2인, 좌주(座主) 우치인(禹治仁), 별임(別任) 이한상(李漢尙) 외 2인과 함께 계원의 명단을 들고, 그 외 사찰측의 인사들을 기록하였다. 즉 주지의 명단이 없이 화주(化主) 석찬식(釋贊寔), 석유성(釋有性), 장수(匠手) 석중연(釋重衍), 화원(畵員) 석부첨(釋富添), 도감(都監) 석승휘(釋升煇), 공양(共[供]粮) 석풍계(釋豊啓), 석세운(釋世云) 등 불사에 소요되는 여러 기능들을 열거하였다. | ||
먼저 대웅전은 1990년에 중건된 정면 3간, 측면 2간의 맞배지붕이며, 총 20평이다. |